실명(實名)을 사용하도록 한 제도들이 있다. 비교적 잘 알려진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외에도 정책실명제, 택시운전기사실명제, 그리고 기사실명제가 운용되고 있는 중이다. 분야는 다양하지만 실명제 도입의 공통된 취지는 투명성을 높이고 책임성을 제고하는 데에 있다. 문제는 이러한 취지가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일 것이다.

Q) 최근 특정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불과 며칠의 시차를 두고 A 매체와 B 매체에 올라왔다. 한, 두 문장을 제외하면 완벽하게 동일한 기사다. 물론, 바이라인에 적힌 기자 이름은 달랐으나 메일 주소가 동일한 점 등에 비추어 다들 한 사람이 기사를 작성했다고 추측한다. 이러한 추정이 맞다면 적어도 하나의 기사 이상이 가명으로 혹은 명의를 도용해서 작성된 셈이다. 이런 식으로 기사를 작성해도 괜찮은 것인가? 법적으로 제재를 가할 방법은 없는지 궁금하다.

A) 기사에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가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다. 지금은 기사에 기자 이름 없는 것이 더 생소하지만 과거에는 기명기사가 예외적이었다. 기사에 기자 이름을 명기하는 관행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이며 이른바 ‘기사실명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점은 1990년대다. 1993년 조선일보를 시작으로 이듬해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으로 확대된 기사실명제를 거의 대다수 신문들이 채택하였다.

기사실명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조선일보>는 1993. 3. 28.자 지면을 통해 ‘신문기사의 정확성과 공정성을 기하고 진실 추구에 더욱 무거운 책임을 지기 위해’ 실명제를 도입한다고 설명했다. 일단, 기사실명제를 우리 언론이 도입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실명제 도입으로 적어도 누가 기사를 작성했는지 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투명성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이름만 명기했던 것에서 언제부터인가 이메일 주소도 명기하고 있으니 질적으로도 발전했다. 여기에 더해 2022년 한국언론학회 세미나에서는 데스크 이름까지 기재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문제는 기사실명제가 기사 내용의 정확성, 신뢰성, 책임성까지 담보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3년 <언론수용자 조사결과>에 따르면,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도가 2021년 3.32점에서 2023년 3.27점으로 하락했다. 언론인에 대한 신뢰도 역시 2021년 6위에서 2023년 7위로 한 계단 내려왔다. 상황이 이미 충분히 좋지 않은데 최근 들어서는 기사에 대한 신뢰도를 더 깎아먹을 심각한 상황이 생겼다. 바로 가명(假名) 혹은 차명 기사의 출현이다. 기사를 실제 작성한 기자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가명 혹은 차명으로 기사에 표기하는 것이다.

가명 내지 차명기사는 30년 이상 운용되어온 기사실명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까 싶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조차 제대로 밝힐 수 없는 기사라면 그 내용에 대한 신뢰를 얻기란 언감생심이다. 말하자면, 언론의 심각한 자해행위다.

가명 혹은 차명기사에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가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그럼 기사에 기자의 실명을 기재할 법적 의무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기사실명제는 개별 언론사들이 자발적으로 도입한 제도로서 그 규범적 근거는 사규 정도가 될 것이다. 즉, 가명 혹은 차명기사는 사규 위반으로서 해당 기자가 소속된 회사 내 징계사유에 해당될 뿐이며 법규 위반이 아니니 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명 기사의 해악을 고려해보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현행 신문법 규정에는 기자의 가명 혹은 차명 사용을 규제할 만한 근거가 없다. 차제에 관련 법률 개정을 통해 기사에 반드시 기자의 실명을 적도록 하고, 이를 위반했을 경우에는 해당 언론사에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명·차명으로 인한 소송 지연시, 배상 책임 물을 수 있어 

한편, 가명 혹은 차명을 사용한 점 자체를 문제삼기는 어렵더라도 해당 기사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고 물어야 한다. 정정보도·반론보도·추후보도청구는 애당초 기자 개인이 아닌, 언론사를 상대로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명·차명기사라도 아무런 장애가 없다.

손해배상청구의 경우에도 기자 개인보다는 변제할 능력이 상대적으로 높은 언론사를 상대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법적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가명·차명기사가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가명·차명인 줄 모르고 기사에 적힌 명의자를 상대로 고소·고발을 하거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기껏 공들여 제기한 고소·고발, 소송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할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상대방이 가명·차명을 사용함으로써 발생한 손해이므로 이러한 소송 지연 내지 불필요한 시간 및 비용 지출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청구로써 배상을 시도해볼 수 있다.

불법행위의 요건에 해당하는 위법성이란, 법규에서 의무로 규정하지 않았더라도 신의성실 원칙이라든가, 흔히 상식이라고도 불리는 사회상규에 반하는 행위이기만 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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