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에 열린 한국광고대회에서 신인섭 전 중앙대 초빙교수가  올해의 '자랑스런 한국광고인상'을 수상했다.

1929년생으로 올해 95세의 신 교수는 무려 55년을 광고계에 종사했다. 신문사 광고국, 기업의 광고담당으로 일했고, 특히 국제광고협회 한국지부와 아시아광고회의의 사무총장도 역임하며 한국의 광고계를 세계에 알렸다. ABC협회 초대 전무이사를 맡아 신문·잡지 부수공사 실현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한국 광고산업의 발전과 선진화를 위해 애써오고 있는 신 교수를 자택에서 만나 그의 삶과 철학을 들어 봤다.  

△ 신인섭 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 신인섭 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Q. 반갑습니다. 교수님. 최근 자랑스런 한국광고인상을 광고대회에서 받으셨는데요. 한국을 대표하는 광고인이라는 의미가 담긴 것 같습니다. 반세기를 광고계를 위해 애쓰신만큼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광고인으로 사회생활을 현대경제일보(현 한국경제신문) 광고국에서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같은 신문사인데도 편집국에 “광고국 사람은 출입을 삼가해 주십시오”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표면상으로 기사 간섭 우려 때문이라 하는데, 사실은 광고를 깔보고, '광고쟁이'라 부를 만큼 낮춰 보는 시각이 있었어요.

어떤 일이 있었나 하면, 편집국 차장이 이북서 대학교 국문과 동기여서 편집국에 만나러 갔어요. 1•4 후퇴 이후 10년 만에 만났으니 “야 반갑다” 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영 시무룩했어요. 바쁘다고 따로 만나자고 하는데 편집국에 광고국 사람은 출입금지라 그랬던 것 같아 무시당한 느낌이었어요.

그 뒤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광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싸움을 계속 해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광고인상을 받을 때도 세 가지를 이야기했어요.

먼저 광고는 신이 내린 어엿한 직업입니다. 광고는 하나님이 내려준 직업 가운데 하나에요. 쟁이가 하는 일이 아닌 점을 강조해 광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단 말을 했어요.

둘째, 광고의 자유 없는 언론은 민주언론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동아일보가 광고사태(1974)를 겪을 때, 동아일보 및 계열 방송사 광고가 다 사라지자 국민들이 격려광고로 동아일보를 후원했어요.

그래서 동아일보가 ‘광고의 자유없는 언론은 민주언론이 아니다’란 기사를 냈어요. 그만큼 광고의 역할이 언론에도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광고의 과학화에 힘 썼습니다. 1987년 6.29선언 이후로 세상이 달라졌어요. 표현의 자유가 비로소 허용된 거죠. 그때 신문, 잡지가 엄청 늘어났는데 이 때 신문부수 밝히라며 1989년 ABC협회가 설립됐어요. 다들 기피하던 ABC협회 전무를 맡았어요

Q. 교수님께서는 1989년 다들 선뜻 나서기 어려워하던 한국ABC협회의 초대 전무이사로 취임해 신문•잡지부수공사제도의 국내 도입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ABC 도입에 대한 국내 여론과 반응 등은 어땠나요?

ABC협회를 창립하는데 회의에서 임원진(회장, 전무)을 아무도 안 맡으려고 서로 얼굴만 쳐다 봤어요. 이 때 동아일보 지인이 추천해 제가 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ABC협회에 초기 6년 동안 있으면서 일본 ABC협회, 미국 뉴욕타임즈의 광고부장을 만나 ABC 부수공사 방법을 배워왔습니다. 반 우스개소리로 ABC 공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하니, 일본에서는 공사원이 신문지국에 검증을 하러 갔더니 지국장이 책상에서 칼을 갈고 있더랍니다. 진짜 칼을 갈고 있었던 거에요.  그렇게 공사원을 위협한거죠.

우리나라도 신문부수공사에 대해 지국장들의 반대가 심했어요. 지역 광고를 하려면 신문부수가 중요한데 지국들의 수입과 연결되어 있으니 공사를 싫어했죠. 그러다 국제광고협회(IAA) 한국지부의 사무총장으로 적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국제광고대회 경험이 있다보니 IAA 세계광고대회를 앞둔 시점에 추천받은 것도 있지만, ABC협회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고 판단했어요
 

△ 일본 ABC협회와 미국 뉴욕타임즈를 방문한 사진을 보여주는 신인섭 교수
△ 일본 ABC협회와 미국 뉴욕타임즈를 방문한 사진을 보여주는 신인섭 교수

Q. 국제광고협회 한국지부의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많은 활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일들을 듣고 싶은데요.

1996년에 IAA세계광고대회가 서울 코엑스에서 열렸습니다. 세계광고대회를 광고계의 올림픽이라고도 부르는데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고 대표 일행을 청와대로 부를 만큼 사회적 관심이 높았습니다.

세계광고대회는 유치 자본과 연사가 가장 중요했어요. 사람들이 연사를 보고 오지 않겠어요? 문제는 한국의 위상이 지금같지 않았다는 거죠.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연사 관련 회의때,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 퇴임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을 데려오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당시 대처 수상은 2년 전부터 섭외를 해야하고 최소 1년 스케줄이 다 잡혀 있었어요. 대회를 몇 달 앞두고 연락하니 될 턱이 없었죠. 당시 그만큼 국내에서는 국제 회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시절이었어요.

Q. 젊은 시절, 육군 장교로 근무하시다가 예편을 하셨는데, 사회에 나와 신문사에서 광고일을 시작하신 계기가 있었나요?

통역장교로 갔었는데, 일제시절 배운 영어라 제 발음이 일본식이었어요 아주 고생했어요. 영어잘한다서 뽑아놨더니 미군이 못알아듣겠다고 하니...

1963년에 제대했는데 당시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어요. 봉급은 안 줘도 되니 명함만이라고 갖게 해달라 할 정도였으니까…

처음에는 군대 통역장교 경력으로 한국관광공사 계열사인 대한여행사의 여행과장으로 취직했어요. 당시 여행과장 권한이 대단했어요. 대한여행사를 통해서만 외국인 관광객들이 들어오고 여행과장이 관광객들의 숙소를 배정했으니까요.

그런데 미국 여행사 헨필 관광의 관광객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심사과와 팁을 두고 갈등이 있었어요. 관광객들에게 받을 팁 정가표를 달라는데, 아니 세상에 팁값을 정해놓고 받는 곳이 어딨어요? 결국 군 출신인 호텔 총지배인의 도움으로 해결했는데 대한여행사는 평생 일할 곳은 아니다 싶더라고요.

마침 평양사범학교 선배가 현대경제일보의 사장이 됐어요. 선배(사장)가 신문사에 광고부장으로 와서 일하라 해서 갔죠. 광고국이 그리 홀대받는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일하다보니 광고부장은 사람 취급을 안해 그만두려 했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의 사범학교 선배는 군대 상사나 마찬가지라 3년 선배인 사장한테 감히 그만두겠단 말을 못해 광고일을 계속 하게 됐어요... 

Q. 반세기 넘게 광고계를 위해 공헌해 주셨는데요. 기획하신 광고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캠페인이 궁금합니다.

호남정유(현 GS칼텍스)에서 광고를 담당할 때 기획한 ‘청춘의 샘으로 오십시오’란 캠페인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광고인데 원본을 미국에서 가져와 변형시켰어요. 필리핀서 가져온 배경음악을 6가지로 만들어 당시 크게 인기를 끌었어요.

또 1975년에 호남정유에서 강남에 벌룬(대형 풍선) 광고를 띄운게 크게 히트쳤어요. 당시 상공부에서 석유 파동 위기(Oil shock)가 지난지 2-3년 밖에 안됐으니 벌룬을 내리라고 했어요. 게다가 호남정유가 설립되지 1년 만에 시장을 30%나 점유해 독점이었던 석유공사를 위협하니 정부서 캠페인을 못하게 했을 겁니다.

이를 보고 당시 호남정유 재정담당이사가 “수술은 대성공했는데 환자는 죽었다”고 말한게 기억납니다.

△ 호남정유 '청춘의 샘으로 오십시오' 인쇄 광고
△ 호남정유 '청춘의 샘으로 오십시오' 인쇄 광고

Q. 한국 광고사를 정리한 서적도 출간하셨는데요. 국내 광고회사들이 태동하던 시절 많은 역할을 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회상할만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1968년 코카콜라, 펩시콜라가, 1969년 호남정유가 국내 들어왔습니다. 당시 콜라 종류가 스무 종이 넘게 사라졌는데 코카콜라와 펩시콜라가 광고로 자신들을 적극 알렸어요.

이 때 즈음부터 기업들이 광고대행사를 쓰기 시작했는데 1973년 삼성그룹이 제일기획을 설립했어요. 당시 MBC도 광고대행사 연합광고를 만들었습니다. 광고대행사들이 생겨나긴 했는데 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미국광고대행사협회에서 나온 서적 ‘광고대행사란 무엇이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가(1971)’를 번역해 광고대행사들에 나눠 줬어요. 이 책 덕에 광고대행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광고계가 알게 됐다고 자부합니다. 

△ '광고대행사란 무엇이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가' 서적 사진을 보여주는 신인섭 교수
△ '광고대행사란 무엇이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가' 서적 사진을 보여주는 신인섭 교수

Q. 한국서는 1984년에 처음으로 주최한 아시아광고회의 사무총장도 역임하셨는데요. 첫 주최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당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아시아광고대회를 40개 국가가 모여 하는데 당시에는 일본이 아시아광고계를 지배하고 있었어요. 아시아에서 광고대회를 하려면 일본을 설득해야 했죠. 왜냐하면 국제 회의할 때 돈이 상당이 들어갈거 아니에요? 만찬만 해도 700명이 고급스럽게 식사를 하면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니까…

그래서 일본의 최대 광고회사 덴쓰가 아시아광고대회의 주요 스폰서였어요. 일본을 설득하고자 훌륭한 연사들을 섭외해 모셨어요. 그리고 40개국에 알려야 하는데 알릴 수단이 팩스 밖에 없다보니 로드쇼를 다녀야 했어요.

당시 오리콤 사장이었던 김석년 씨, 이기영 씨와 셋이서 팀을 이뤄 프로그램을 짰는데요. 고생이 많았던게 조직위원회 사람들이 일한다 해놓고 회의에 잘 나오지도 않았어요.

영어 소통이 가능한 광고인이 거의 없다 보니 저 혼자 파키스탄,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폴, 홍콩에 판촉을 다녔습니다. 특히 파키스탄이 기억에 남는데요. 파키스탄이 당시 군정인지라 공보부 장관이 육군 중장이었습니다.

미팅에서 공보부장관이 들어올 때, 제가 경례를 하며 '한국의 예비역 소령 신고합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공보부장관이 크게 웃으며 서로 친구가 됐어요. 군정시절이라 장군출신 공보부 장관이 뜨다보니 다음날 파키스탄의 모든 언론들이 대서특필을 했습니다. 한국 영사관에서 놀랄정도 였죠. 본국에 보고거리 하나 생긴거죠. 당시 주 파키스탄 북한대사관은 50명 한국은 10명도 안됐던 시절이거든요. 파키스탄은 다음 광고대회(1989) 유치 목적도 있어서 전통음악가 5~6명을 포함해 약 50명을 한국에 파견했습니다.

Q. 광고시장은 국내 다른 산업에 비해 성장이 정체해 있습니다. 미국, 중국,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규모가 작기도 한데요. 우리나라 광고시장이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한국 시장이 그래도 130억 달러 규모로 큽니다. 작다는 비교는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더 성장하기 위한 방법을 살펴보면 물론 광고주가 광고를 많이 하는게 가장 중요할 테구요. 큰 틀에서 보면 세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먼저 광고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합니다. 가령 광고인상을 누군가 받았다고 하면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아요. 반면 언론계에서 상을 받으면 여기저기 보도되죠. 우리나라는 광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아요.

그 다음 케이스 스터디를 많이 해야 합니다. 광고주가 성공적으로 광고한 사례를 많이 발표해야 해요. 광고주 중에 삼성전자가 글로벌 5위, 광고대행사 중에 제일기획이 10위에요. 해외서 성공한 좋은 사례가 많을텐데 많이 알려지지 않는 편입니다.

마지막으로 광고단체가 정부와 직접 통화하는 채널이 활성화되야 해요. 광고계에 문제가 있으면 문화체육관광부이나 담당 장관과 수시로 의견을 주고 받아야 해요. 필리핀은 광고단체장과 문체부 장관이 다이렉트로 통화를 해요. 정기적인 대화 채널 중요해요.

Q.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과 학림대 정론정보학부에서 20여년간 교육을 통한 후학 양성과 광고 연구에도 힘 써주셨는데요. 교육 현장에서 느끼신 우리나라 광고 교육의 장단점과 개선 방향 같은 것들이 있을까요?

일단 강의를 하면서 느낀 점이 시간 약속을 잘 안 지킵니다. 강의 시간에 늦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단순히 시간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는 원칙과 규칙이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또 미국은 박사 과정의 학자들이 광고 현업을 알고자하면 미국 광고업협회에서 지원해 1-2주 동안 현업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광고주협회와 광고업협회가 협업하여 학자들에게 기업의 현장 체험을 제공하면 학계의 경쟁력이 강화될 것입니다.

Q. 선진 시장과 달리 국내는 광고물과 관련 저작물들을 효율적으로 보관, 관리하는 아카이브(저장소)가 부재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관련해 정부, 학계, 광고단체 등 관련 업계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부산에서 내년 3월 8일에 광고박물관 발족식을 합니다. 저도 자료를 보내려고 정리하고 있어요. 미국에서는 광고박물관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살펴봤는데요. 가령 듀크대학은 광고회사 제이월터톰슨으로부터 매년 수천개의 자료들을 받아 자산으로 삼고 있어요. 우리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광고회사들이 자료들을 많이 갖고 있어요. 우리는 그러지 못해요. 경주대에서 광고박물관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관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박물관을 운영한 윤석태 씨 자료 일부분을 제가 갖고 있어요. 부산광고박물관 준비중인 이의자 교수에게 보내줬어요. 이외에도 국내 광고 자료들이 새로 여는 광고박물관으로 모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여전히 활발한 저작활동을 하고 있는 신교수는 인터뷰 후 헤어질때 기자에게  '2024년 광고 시장 관련해 기고할 글이 있다'고 했다.  '이런 광고인이 또 있을까?' 50여년을 넘게 이어져 온 광고에 대한 열정에 감탄했다. 동시에 2시간에 가까운 인터뷰 내내 강조하던  '광고에 대한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던 말이 가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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