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재 시집 『산책시편』 표지 (1993)
△ 이문재 시집 『산책시편』 표지 (1993)

첫눈이 내렸다는 뉴스를 보면 다들 마음이 설렐 것이다. 첫눈 올 때 만나자는 약속도 추억의 사진첩처럼 떠오를 것이다. 첫눈은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자연의 축복이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설렘이다.

하지만 하얗게 내리는 첫눈이 만약 산성(酸性) 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

이문재(李文宰, 1959~ ) 시인의 시 <산성눈 내리네>를 읽고 나면 앞이 캄캄해진다. 시에서는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산성 눈으로 고발하며 인간의 각성을 촉구했다. 시 제목부터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산성눈 내린다
12월 썩은 구름들 아래
병실 밖의 아이들이 놀다 간다
성가의 후렴들이 지워지고
산성눈 하얗게 온 세상 덮고 있다
하마터면 아름답다고 말할 뻔 했다
캄캄하고 고요하다

그러고 보면 땅이나 하늘
자연은 결코 참을성이 있는 게 아니다
산성눈 한 뼘이나 쌓인다 폭설이다
당분간은 두절이다
우뚝한 굴뚝, 은색의 바퀴들에
그렇다. 무서운 이 시대의 속도에 치여
내 몸과 마음의 서까래
몇 개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쓰러져 숨 쉬다 보면
실핏줄 속으로 모래 같은 것들 가득
고인다 산성눈 펑펑 내린다
자연은 인간에 대한
기다림을 아예 갖고 있지 않다
펄펄 사람의 죄악이 내린다
하늘은 저렇게 무너지는 것이다

시집 『산책시편』(민음사, 1993)에 수록된 2연 22행의 자유시다. 환경오염을 상징하는 산성 눈으로 현대 문명의 환경 파괴를 비판했으니 생태주의 시이기도 하다. 시의 핵심어로 쓰인 산성(酸性)은 인간의 환경 파괴에 대한 자연의 보복을 상징한다.

산성 눈은 대기오염으로 중금속이나 고농도의 황산과 질산이 다량 함유돼 산성으로 성질이 변해버린 눈이다. 산성 눈을 맞으면 인체에 치명적이고, 산성 눈은 초목을 고사시킨다고 한다. 시에서는 산성 눈이 내리면 사람이 지워지고 소멸된다는 암울한 현실을 묘사했다.

제1연에서는 12월에 산성 눈이 내리는 암울한 풍경을 제시하며 시를 읽는 독자에게 위기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썩은 구름들 아래”로 산성 눈이 “하얗게 온 세상 덮고 있다”고 묘사하며, 시인은 눈 내리는 광경에 “하마터면 아름답다고 말할 뻔했다”며 안타까운 현실을 고발했다.

여기에서 ‘썩은 구름’은 심각하게 오염된 구름을 뜻하다. 마지막 행의 “캄캄하고 고요하다”는 구절은 밤에 눈이 하얗게 내리는 상황을 묘사한 반어법 표현으로, 산성 눈 때문에 암담해진 설경을 상징한다.

제2연에서는 환경 파괴의 공포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현대 문명을 나타내는 “우뚝한 굴뚝”과 “은색의 바퀴들”에 의해,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내 몸과 마음의 서까래”도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시인은 산성 눈을 환경을 파괴한 죄악의 대가로 묘사하며, 겉으로는 평화로워보여도 사람의 죄악이 “펄펄 내린다”고 묘사했다.

시인은 시의 마지막 행에서 “하늘은 저렇게 무너지는 것”이라고 쓰며 인간의 이기심으로 자행된 환경 파괴의 심각한 민낯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준엄하게 경고했다.

올해 내리는 눈은 산성 눈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언제든 산성 눈이 내릴 수도 있다. 시인이 “펄펄 사람의 죄악”이 내려 “하늘은 저렇게 무너지는 것”이라며 경고하듯, 우리는 하늘이 무너지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

이 시는 환경오염 때문에 산성 눈이 내린다는 점을 환기하고 생태계 파괴의 심각성을 고발했다는 점에서, 환경인문학의 생태 시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기업에서 여러 형태의 사보나 사외보를 발행하고 있는데, 1쪽 정도를 할애해서 생태 시를 비롯한 환경인문학 관련 콘텐츠를 소개했으면 싶다. 그러한 작은 시도가 사람들에게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구체적으로 눈뜨게 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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