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국, 일본의 ABC는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2021년은 한국ABC협회가 창립 32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미국ABC는 107주년, 영국ABC는 90주년, 일본 ABC는 69년 생일을 맞이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ABC 제도가 정착하기까지는 퍽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미국의 경우도 1899년의 미국광고주협회(이 단체는 1910년에 ANA, 전국광고주협회로 바뀌었다)의 신문부수 공개 요구가 실현되기까지 10여년이 걸렸다.

미국의 경우는 1896년에는 죠지 P. 로웰(George P. Rowell)이 미국신문연감이라고 할 American Newspaper Directory를 발행했다. 5,411개의 각종 미국 간행물과 367개 캐나다 간행물의 디렉토리가 추정 발행부수를 곁들여 발표되자 미국 언론계가 발카닥 뒤집힐 만큼 소동이 일어났다.

이 명단에 나온 간행물의 발행부수가 틀렸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 디렉토리가 전환점이 되어 극비이던 신문 잡지 발행부수 논의가 공론화 되었고 1914년에는 드디어 세계 최초의 발행부수 공사 ABC 제도가 탄생했다.

로웰은 미국ABC제도의 씨를 뿌린 셈이었다. 또한 로웰은 1888년에 미국 최초의 광고전문지인 Printers Ink를 발행했다.

일본이 미국 ABC 제도를 알게 된 것은 1918년이었고, ABC간담회가 생긴 것은 이로부터 34년이 지난 1952년이었다. 일본이 미군정 하에 있을 때 미군정의건의를 받아 들였다.

1955년에는 ABC협회로 개칭하고 ’58년에 사단법인 인가를 받고 간담회 창설 9년 후인 1961년에 일부 신문부수 공사를 시작했다. ’65년에 잡지 공사, ’76년에 전문지 공사, ’81년에 무료신문(Free Paper)공사를 시작했다. 2020년 현재 신문 77개, 잡지 129개, 전문지 5개, Free Paper 70개지가 공사를 받고 있다.

따라서 모든 신문, 잡지가 ABC의 공사를 받는 것은 아니다. ABC 가입 여부는 매체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ABC협회가 창립되기까지 걸어 온 길도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신문 발행부수에 관한 언급이 처음 나온 것은 1923년 동아일보 편집국에 근무하던 김동성(金東成)이 1924년에 출판한 <신문학(Journalism)>이 처음이었다.

목차에 나온 ‘제4장 영업국’에서 보듯이 광고부장의 업무에는 ‘신문의 매수에 의하야 광고 요금의 차이가 유하니 광고부장은 광고 모집에 각 방면으로 노력하야 실로 신문의 생명을공급한다’고 적혀있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여러 곳에 광고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로부터 8년 뒤인 1932년 2월 2일-5월 4일 기간에 14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활 해(活 海. WH)라는 펜네임으로 연재된 <광고에 대한 일반상식 해설> 5회에서 ‘신문의 선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광고의 견지로 보아 유력한 신문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을 판단하는 요소는 세 가지가 있다. 1) 신문의 판매부수 2) 신문 독자의 구매력 3) 신문의 사회적 신용... 광고주는 먼저 목적하는 신문에 대하여... 1일 평균의 판매부수를 아는 것이 절대 필요한 일이지마는 신문사에서는 이를 발표하지 않는다. 혹 발언한다면 엄청나게 과장(조선신문은 그렇지 않지만)하므로 정확한 판매 부수를 알기는 극히 곤란한 일이다.(밑줄은 필자가 친 것이다.)

해방 전 1942년 임경일(林耕一)의 <신문(新聞)>에도 판매부에 관한 대목에‘ 판매부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그것은 그 신문의 발행부수이다. 각 신문사에서는 타 신문과의 관계, 광고 요금의 관계, 권위 문제 등으로 발행부수를 비밀에 붙이는 것이다’ 고 적혀 있다.

해방 이후 발행부수 조사와 ABC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것은 단기 4289(1956)년 처음으로 발행한 <대한신문연감(大韓新聞年鑑)>에 게재된 조선일보 업무국장 최용진(崔鎔振)의 <신문의 업무실태>였다.

그는 3 페이지에 걸친 이 글에서 ABC제도 도입을 역설했다. 1965년에는 한국일보 광고국 윤동현(尹東鉉)이 고려대학 ‘기업경영연구소’에 위촉해 전국 10대 도시에서 6,000 가구를 대상으로 신문구독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연구소의 <경영연구(經營硏究)>는 발행부수에 대한 특집을 발행했다.

1967년에는 ‘한국ABC연구회’가 출범했다. 창설 당시 연구회는 7개 광고주(6개 제약회사와 해태제과)와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한국일보의 4개신문사가 임원이었다. ’60년대에는 공보부 조사국에서 계속해서 전국 언론매체 실태 조사 결과를 유인물로 발행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신문의 추정 발행부수가 나와 있다.

1968년과 1970년에는 한국ABC연구회가 <신문 잡지구독 실태 조사 보고서>를 두 번에 걸쳐 발행했다. ’72년에는 이 연구회가 <ABC란 무엇인가> 및 <세계의 ABC 1972>를 발행했다. 이보다 앞서 1960년 11월호 <새 廣告>라는 한국 최초의 광고 전문 월간지는 ‘특집ABC’에서 ‘ABC와 광고대리점’을 다루었다.

주춤하던 ABC문제가 다시 대두한 것은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에 표현의 자유가 부활하고 개방시대로 접어 든 뒤였다. 5공화국 시대의 악법으로 알려진 언론기본법은 표현 자유화에 따라 폐지되었다.

개방의 영향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정기간행물의 폭증이었다. 1987년까지 30개이던 일간지가 ’88년말에는 65개로 증가했고 ’90년에는 85개, ’92년에는 드디어 112개로 증가했다.

아울러 1일 발행 면수도 자유화되어 ’88년의 16면에서 ’89년에 20면, ’90년에 24면으로 증가했다. ’91년 12월에는 민간 SBS 방송 개국과 함께 개인시청률 조사 제도인 피플미터(People Meter)제도 도입으로 최신 TV 시청률 자료가 나왔다.

광고환경의 급변은 신문에게는 대응하는 조치 즉, 부수 자료의 공개를 위한 압박이 되었다. 그 족쇠가 풀린 시대가 다가왔고 ABC 제도에 대한 요구는 당연한 시대로 바뀌었다. 그리고 1988년 9월 30일에는 한국광고주협회가 창립되었다.

ABC협회 창립과 운영에 필요한 재정은 정부가 공익자금 50억원을, 광고주협회가 30억원을 제공하면서 한국ABC협회 창립과 운영 기금 문제가 해결되었다. 1961년 군사정변 이래 30년 가까이 표현의 자유를 묶어 둔 정부가 댓가를 지불한 셈이었다.

대한신문연감의 ABC 기사를 기준하면 33년만에 한국ABC협회가 탄생한 셈이다. 1989년 5월 31일 한국ABC협회가 창립된 이후 ABC제도 정착을 위해 노력한 단체는 여럿 있다. 가장 앞장 선 것은 다른 나 라의 경우처럼 한국광고주협회였다.

그 숨은 지원의 가장 큰 증거가 1996년부터 2006년까지 실시한 ‘인쇄매체수용자조사’였다. 전국 10,000가구 대상, 개인면접조사 실시에는 억대의 자금이 필요했다. 이 조사는 신문, 잡지 부수 조사란 어떤 것이며, 왜 필요하며 어떤 효과가 있는가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광고주와 그 대행사는 물론이거니와 매체사에게도 부수 공개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소중한 자료 구실을 했다. ABC협회가 창설되기는 했으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공사가 지연되는 가운데 시행된 이 신문 발행부수 조사는 매우 선각(先覺)적인 일이었다.

지금의 한국광고총연합회의 도움도 컸다. 정부의 재정 지원이 결정된 뒤에도 ABC협회가 창립될 때까지 수많은 일을 위해 도와 준 단체는 한국광고 총연합회였다. 아울러 매체사 가운데서도 이 운동에 앞장 선 신문사의 도움도 있었다.

아마 한국ABC협회가 창립되기까지의 자료를 합치면 몇 권의 책이 될 만큼 많은 논의, 연구, 세미나와발표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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