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외교와 이민 등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진 도널트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세계가 술렁이는 가운데, 트럼프가 당선된 배경과 당위성을 피력하는 칼럼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 김덕한 뉴욕 특파원은 22일 '트럼프를 위한 변명'이란 칼럼을 통해 민주당이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을 '무식하고 교양없는 사람'으로 매도하는데만 집중하고 가장 중요한 정책 부분을 소홀히 한 것을 패착요인으로 지적했다.

김 특파원은 "이기고 봐야 하는 대선에서 어려운 정책 설명으로 어떻게 이기느냐는 반론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걸 지레 포기하고서는 결국 이길 수 없다는 걸 이번 미국 대선이 보여준 것 같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김덕한 조선일보 뉴욕 특파원의 칼럼 전문이다.

트럼프를 위한 변명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홍콩 누아르에 나오는 불사신 같다. 영화 '영웅본색'의 주인공 소마(주윤발 분)는 총알이 빗발치는 거리를 맨몸으로 달려도, 빌딩에서 떨어져 몇 번을 굴러도 죽지 않는다. 미국 대선 기간에 트럼프는 '입' 가졌다는 미국 언론, 지식인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내가 올해 들어 인터뷰한 지식인, 정치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어떻게 트럼프 같은 인간이…"를 입에 달았다. 그 '트럼프 같은 인간이' 링컨의 정당인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됐을 때 그들은 당황했고 대통령이 되자 공포까지 느끼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석학이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커진 지난 8일 밤 "무서우리만큼 믿기 어렵다. 나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글을 뉴욕타임스에 올렸다가 다음 날 지웠다.

트럼프는 오직 입 하나로 버텼다. 소마가 총 한 자루로 불바다를 누비듯 트럼프는 막말과 욕설, 감언이설, 쇼맨십으로, 그렇게 맞고도 안 죽고 살아서 대통령이 됐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널려 있었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많았다. 그런데도 트럼프가 이겼다. 부동산 재벌인 그가 '못 배우고 가난한 백인들의 대변자'가 되는 얼핏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일어나게 한 그의 '주장'을 파헤치고 깨뜨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트럼프의 집권이 초래할 위기에 대해 진지하게 설득하지 못하고 '도저히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수준 낮고 천박한 트럼프'만을 강조하며, 전선(戰線)을 상호비방전에다 설정한 것은 한참 잘못된 선택이었다. 트럼프의 주장대로 나토(NATO)와 나프타(NAFTA)가 무너지면 미국의 안보와 산업이 어떻게 흔들릴 것인지, 미국 이외의 세계가 흔들리면 미국은 얼마나 큰 부메랑을 맞게 될 것인지 설득하지 못했다. 이런 얘기들은 트럼프 정부의 인선(人選) 작업이 한창인 지금에야 듣고 있다.

인신공격으로 치고받는다면 클린턴이 완승을 하긴 어려운 구조였다. 클린턴이 국무장관의 공무 비밀 메일까지 개인 이메일 계정으로 주고받은 걸 은폐하기 위해 3만3000건이나 되는 이메일을 지웠고, 월가(街)의 금융기관에서 한 번 강연에 몇 억원씩 받았고, 전직 대통령인 남편과 만든 재단에 엄청난 기부를 받았다는 사실은 실제로 심각한 결격 사유였다. 이 전선에서 싸우다 클린턴은 최후의 순간까지 발목이 잡혔다. 클린턴과 그 지지자들의 머릿속에 당위에 대한 오만, 상대방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깔려 있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클린턴 진영을 대할 때 이른바 '무식하고 교양 없는' 사람들은 침묵하고 숨는다. 그러나 마음속엔 칼을 간다. 그 칼이 이번 대선에서 '기득권'을 내리쳤다는 사실을 지고 난 뒤에야 깨달았을 것이다.

지난 7일 선거 유세 마지막 날 클린턴이 행했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벽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리조차 위선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다리는 벽보다 한참 못한 것이 돼 버린다. 이기고 봐야 하는 대선에서 어려운 정책 설명으로 어떻게 이기느냐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지레 포기하고서는 결국 이길 수 없다는 걸 이번 미국 대선이 보여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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