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 전경련 前기획본부장

나라도 춥고 회사도 춥던 1998년 1월,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긴급 소집된 전경련 회장단 회의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회장단은 평소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였지만 농담조차 선뜻 꺼내기 힘들 정도로 긴장이 팽배해 있었다.

그런데 김우중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다보스포럼 다녀오는 길에 몇 군데 둘러봤어요, 환율이 좋아져 돌멩이도 수출이 될 것 같아요.” 500억 달러 국제수지 흑자론의 시발이었다.

당시 정부의 흑자 전망은 28억 달러, 그런데 그 해 한국경제는 416억 달러의 흑자를 시현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되살아났다. 희망이 보였다. 결국 정치가 망친 나라를 경제가 다시 일으켜 세웠다. 김우중 회장은 나라를 구한 1등 공신이었다. 그는 일하고 또 일했다.

어느 날 아침 신문을 펼치니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무슨 행사를 주재하는 사진이 실렸다. 오늘은 편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조금 뒤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김우중 회장님이 11시에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자고 그러시네요.”,
“아니 리비아 계시던데?”,   “행사 끝나고 바로 비행기 타셨대요.”

입이 벌어졌다. 토요일 오후 업무보고가 있었다. 오후 10시경 회의가 끝나 힐튼호텔 로비 바에서 마침 중계되던 축구 경기를 보고 나왔다. 11시 반 경? 그런데 김 회장 수행비서가 로비에 서 있었다.

“회장님은요?”,  “아직 사무실에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알고 보니 오후 10시에 다른 회의가 또 시작돼서 곧 끝난다고 했다. “이래가지고 언제 쉬세요?” 하고 물었더니 “짬나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야”하면서 또 일거리를 찾는 표정이었다. 그가 이렇게 일하고 또 일한 덕분에 우리는 초근목피를 먹던 시절에서 벗어나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도약했다. 몇 년 전 하노이에서 만나 가장 기억나는 곳이 어디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의 붉은 흙이 보고 싶어, 뜨거운 공기 맡으며.”

비록 은퇴했지만 그의 가슴에는 이글거리는 열정이 있었다. 요새 젊은이들이 많이 약해졌다고 하자 “우리가 언제 젊은이들한테 기회라도 줘봤냐고요.”라며 고개를 휘저었다. 눈빛이 빛났다. 그는 가슴 속의 열정을 모아 젊은이를 위한 기회를 만들었다.

남들이 말의 성찬을 벌이고 있을 때 그는 발로 뛰었다. 청년기업가 양성 프로그램(GYBM)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렇게 밖으로 나간 한국의 젊은이가 천 명이 넘는다. 그들은 김우중 회장의 희망대로 다음 세대를 위한 가교를 쌓을 것이다. 그들이 개척한 경제 영토는 한국을 먹여 살리고 김우중 신화를 세계 곳곳에 재현해 낼 것이다.

김우중 회장 덕분에 나는 아침, 점심, 저녁을 각각 다른 나라에서 먹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었다. 아침은 런던, 점심은 룩셈부르크, 저녁은 조금 늦게 루마니아에서. 그때는 그게 뭐 대수냐 싶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세계를 봤고 미래를 만났다. 김우중 회장 시대의 젊은이로 그와 같이 있었다는 것, 그와 같은 스승이 계셨다는 것 하나로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김우중 회장님의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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