슘페터의 견해에 따라 혁신지향성을 기준으로 우리경제의 곳간인 재정사업을 철저히 재점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되고 있다.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19일 동아일보를 통해 <슘페터에게 나라곳간 열쇠를 맡긴다면>이라는 글을 게재하고, 국가재정의 마지막 1원까지도 혁신을 진작하는데 사용되는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서로 다른 케인스와 슘페터의 관점으로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재해석한 이 교수는 “중국정부는 정부재정을 ‘확장적’이면서 ‘혁신지향적’으로 쓰고 있다”며 “(우리나라도)한 푼 한 푼이 민간 부문의 혁신적 아이디어, 기업가 정신을 진작하는 데 집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예로 이 교수는 “정부가 단 하나의 가로등을 설치할 때도 더 혁신적인 제품을 구매하고, 산업계가 더 높은 스펙의 터빈에 도전해서 공급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며 “혁신적 문화콘텐츠나 정보시스템, 더 획기적인 복지서비스 모델로 도전하는 기업가에게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주어야 한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올해 대한민국의 국가재정이 기왕에 케인스의 견해에 따라 확장적 규모로 편성되었으니 이제는 슘페터의 견해에 따라 혁신지향성을 기준으로 재정사업을 철저히 재점검할 때”라며 글을 마쳤다.

다음은 이정동 교수가 동아일보에 게재한 글 전문이다.
 

[동아광장/이정동]슘페터에게 나라곳간 열쇠를 맡긴다면

산업활동 침체의 원인을 진단할 때 크게 수요와 공급 측 견해가 나뉜다. 우선 물건을 팔 시장이 없는 것이 문제라면 댐을 짓든 도시를 개발하든 넉넉하게 지출한 정부재정을 마중물 삼아 산업 수요를 불러일으키는 게 핵심 처방이다. 반대로 혁신적 아이디어가 부족하면 규제를 완화하든 창업자금을 퍼붓든 혁신의 공급을 불러일으키는 게 급선무다. 시장 수요를 진작시켜야 한다는 전자의 주장이 케인스의 입장이라면, 혁신의 공급이 중요하다는 후자의 주장은 슘페터의 입장이다.

서로 다른 케인스와 슘페터의 관점으로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재해석해 보면 흥미로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내용은 60개국 이상의 현장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인프라 투자사업의 묶음이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 케인스와 슘페터의 시각이 골고루 반영돼 있다.

우선 지난 30년간 급속히 확대된 자본설비가 남아돌면서 중국경제가 침제에 빠질 것이란 우려가 많았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유휴자본과 인력에 숨통을 터주는 새로운 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만 보면 전형적인 케인스식의 수요 창출 정책이다.

다른 한편 고속철, 통신망, 에너지 인프라 등 모든 핵심 프로젝트마다 중국기업들이 새롭게 도전하는 기술을 채택하도록 유도해 혁신적 아이디어를 스케일업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혁신 공급에 초점을 맞춘 슘페터식 처방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청국장 파스타’처럼 수요 측과 공급 측 처방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현대판 산업정책의 종합 패키지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정부는 정부재정을 ‘확장적’이면서 ‘혁신지향적’으로 쓰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초기 단계에선 수출 주도 성장전략이 비슷한 역할을 했다. 수출시장이라는 넓은 수요가 뒷받침되면서 막대한 시설투자의 가동률을 유지했다. 다른 한편, 선진국 소비자의 까다로운 눈높이를 맞추느라 억지로라도 기술혁신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수출 주도 성장전략은 시장 수요라는 케인스의 키워드와 혁신 공급이라는 슘페터의 아이디어가 만나는 접점에서 만들어진 처방이었다.

우리나라 제조업의 설비가동률은 2010년 이후 계속 떨어져 지난해 말 기준 7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청년실업률도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설비와 사람이 남아돌고 있다. 얼른 떠오르는 처방이 일대일로와 같은 대규모 인프라 투자지만 국내에는 프로젝트의 대안이 없다.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국제 프로젝트는 참여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남은 중요한 정책수단이 있다. 바로 우리 경제의 곳간인 국가재정이다. 공공서비스 제공이라는 목표를 가진 정부는 국가경제에서 지출 규모가 가장 큰 경제주체다. 올해도 429조 원의 재정이 편성됐으니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압도적이다. 이번 재정은 케인스의 견해를 따라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확장적으로 편성됐지만 재정건전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문제의 핵심은 재정 규모가 아니라 재정 운용의 지향성과 내용이다. 한 푼 한 푼이 민간 부문의 혁신적 아이디어, 기업가 정신을 진작하는 데 집행돼야 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단 하나의 가로등을 설치할 때도 더 혁신적인 제품을 구매하고, 산업계가 더 높은 스펙의 터빈에 도전해서 공급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혁신적 문화콘텐츠나 정보시스템, 더 획기적인 복지서비스 모델로 도전하는 기업가에게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공공 부문에 사람을 채용할 때도 단순 업무가 아니라 혁신 아이디어를 만들고 확산할 수 있는 인력을 채용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429조 원의 마지막 1원까지 혁신을 진작하는 데 사용되는지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뿐 아니라 미국도 같은 전략이다. 인터넷, 터치스크린 등 오늘의 애플과 아이폰을 탄생시킨 실리콘밸리의 핵심 기술은 수십 년간 미국 정부재정의 선투자로 얻어진 혁신의 중간 결과물이다.

올해 대한민국의 국가재정이 기왕에 케인스의 견해에 따라 확장적 규모로 편성되었으니 이제는 슘페터의 견해에 따라 혁신지향성을 기준으로 재정사업을 철저히 재점검할 때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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